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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란] 소녀가 온다 - 제주 4.3의 비극 (Hallan,하명미 감독,2025)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광복을 맞은 한반도는 진정한 통일을 맞지 못한다. 남과 북이 갈라지고 제주도가 혼란에 휩싸인다. ‘데모크라시’와 ‘이데올로기’의 깊은 뜻을 모른 채 희생의 탑을 쌓기 시작하는 것이다. 1948년의 격전장은 제주도였다. 1999년 12월 16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고 되어있다. 과연 그해 그 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하명미 감독은 그 때의 비극을 극화한다. 영화 <한란>은 어느 날 갑자기 이데올로기 싸움터에 내몰린 제주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바람 많은 제주 해안마을의 돌담집이 보이고 축사의 돼지를 바라보고 있는 여섯 살 소녀 해성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산으로 올라가서 소식이 끊겼다. 엄마 아진은 어린 딸을 할머니 손에 맡기고 마을 사람과 함께 산으로 향한다. 엄마가 산으로 떠나고 얼마 뒤 군인들이 들이닥치고 마을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려 총살당한다. 노인네고 어린애고 모두. 그런데 어린 해성이 새벽이슬에 깨어난다. 살아남은 것이다. 이제 어린 아이는 아빠가 숨었다는, 엄마가 올라간 그 산길을 따라 무작정 발걸음을 옮긴다. 제주도의 산과 오름에 숨어든 ‘빨갱이 세력’과 빨갱이로 몰려 죽는 게 두려운 마을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의 엄마와 어린 딸의 운명이 엇갈리기 시작한다. 곳곳에서는 군인이 양민을 학살하고 있다. 아진은 어린 딸 해성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제주 4.3사건은 문학계와 대중문화에서 조심스레, 꾸준히, 치열하게 다뤄졌다. 현기영의 ‘순이 삼촌’. 김석범의 ‘화산도’,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 등. 여기 그 추념의 목록에 <한란>이 추가된 것이다.

‘제주 4.3’을 이야기하자면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반대’의 소리가 남아있다.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는 것이 그만큼 관성적이란 것이다. 하명미 감독은 비교적 역사적 균형감에 맞춰 이야기를 풀어간다. 양민학살은 광범위하게 자행되었고 그 어두운 그림자는 오랫동안 제주를 사로잡는다. 당시 제주 인구의 1/10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모든 희생자가 ‘빨갱이’가 아니란 것은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하명미 감독은 마을사람을 학살하는 무리 가운데 ‘서북’(청년단) 완장을 두른 인물을 드러내고, ‘해생’의 아버지 강이철의 죽음을 묘사하며 ‘빨갱이’의 비인간성도 담아낸다. 물론, 학살을 방관하는 미군정의 모습도 잡아낸다. 특히 “모두가 평등한 세상, 평화로운 세상을 꿈꾼다”는 빨치산 대원이 ‘피의 복수’를 이야기하며 “우리가 하는 행동은 다르다”고 강변하는 장면이 있다. ‘전쟁과 혁명’ 한복판에서 피아 간에 서로를 죽이는 가운데 ‘대의명분’의 당파성을 한 줄의 대사에 집어넣은 것이다.


아진은 여섯 살 소녀 해생과 함께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결국 해안에 이른다. 살아남았지만 그들은 이후 오랫동안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그들이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개’(세퍼드)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어디서 풀려난 개인지 산 속을 자유롭게 뛰어다닌다. 그 개는 아진이 죽을 고비에, 해생이 쓰러질 때 옆에서 지켜본다. 목줄에는 ‘US ARMY’가 선명히 찍혀있다. 그 개는 제주도의 비극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제주의 4월 3일이 궁금하다면 하명미 감독의 <한란>을 한 번 보시길. 이제는 ‘현장의 증인’조차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야 미래의 비극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제주도 말을 열심히 하는 배우들의 열정이 느껴진다. 감독과 배우들이 정말 “폭싹 속았수다” (리뷰 박재환)

▶한란 ▶감독/각본:하명미 ▶출연:김향기, 김민채 ▶제작:웬에버스튜디오 ▶배급:트리플픽쳐스 ▶개봉:2025년 11월26일/118분/12세이상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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