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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 무대 위의 호랑이, 구명보트에 올라타다 (Live on Stage)


'음식남녀', '와호장룡', '브로크백 마운틴' 등으로 유명한 대만 출신의 세계적인 거장 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2012)는 캐나다 작가 얀 마텔의 소설이 원작이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경영하던 가족이 경영난에 힘들어하다가 결국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기로 하고 일본화물선에 오른다. 그 배는 폭풍우를 만나 침몰하고, 열일곱 살 주인공 소년 ‘파이’만이 가까스로 구명보트에 오른다. 그런데 화물선에 실렸던 '동물'들도 잇달아 구명보트에 올라탄다.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 그리고 벵골호랑이까지. 소년은 227일 동안 태평양 망망대해를 떠도는 작은 보트에서 사나운 호랑이와 동거를 하게 된다. 그것은 '소년이 전하는' 이야기다. 과연 그 배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얀 마텔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이안 감독의 환상적 영화로 오래 기억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무대극으로 만들어졌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일련의 워크샵을 거쳐 2019년 영국에서 초연 되었고, 브로드웨이를 거쳐 마침내 서울 'GS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렸다. 이 작품은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뮤지컬’이 아니라 배우와 퍼펫(동물인형)이 함께 뒹구는 특별한 ‘연극’(PLAY)이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 동남부 폰디첼리의 ‘피신 몰리토르 파텔’은 친구들에게 ‘파이’(Pi)라 불리는 소년이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동물원은 경영난에 시달리고 정치적 혼란이 잇따르자 동물원을 처분하고 가족이 모두 이민을 가게 된다. 몇몇 처분하지 못한 동물들도 함께. 하지만 곧 폭풍우를 만나고 소년과 동물이 겨우 구명보트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리처드 파커’라는 근사한 이름을 가진 벵골호랑이도. 

 이야기는 227일 동안 태평양을 떠돌다 구조되어 병원에 실려 온 ‘파이’에게 선박회사 조사관이 화물선의 침몰 상황에 대해 캐묻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17살 ‘파이’가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을 물도, 음식도 없는 망망대해 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파이는 기이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조사관은 믿을 수가 없다. 그러자 파이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현실적인 이야기지만 더더욱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관객들은 태평양 쪽배의 진실을 알고 싶으면서도, 결코 알고 싶지 않다. ‘파이’에겐 잔인한 기억이고, 관객에겐 끔찍한 생존담이니.


 이안 감독이 처음 영화를 만들려고 했을 때에도 이 소설을 어떻게 영상화할 것인지 큰 과제였단다. 결국 동물과 CG와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이 스크린을 환상적으로 채우며 파이의 이야기를 이끈다. 무대 연극은 또 다른 과제였다. 극작가 로리타 챠크라바티는 퍼펫(Puppet)을 내세운다. 배우들과 함께 퍼펫티어(Puppeteer,인형사)가 무대를 뛰어다니며, 포효하고, 먹이를 먹어치운다. 이미 <워호스>라는 작품을 통해 인형사와 동물 탈이 혼연일체가 된 무대극을 만나보았기에 이런 소도구가 낯설지는 않다. 기린, 오랑우탄, 염소에 이어 마침내 벵갈호랑이가 등장했을 때 관객들은 이미 ‘리처드 파커’의 맹수적 카리스마에 빠져든다. 관객들은 배우들의 무대연기만큼 퍼펫티어가 펼치는 동물들의 움직임에 매료된다. 아마 공연이 이어지면서 동물들의 관절과 기지개, 버둥대는 모습이 더욱 실감날 것으로 기대된다. 

배우들의 열연과 퍼펫 동물들의 기세가 변화무쌍한 조명과 무대설계에 힘입어 <라이프 오브 파이>는 소설, 영화에 이어 또 하나의 삶을 얻은 셈이다. 이야기의 힘은 세고, 그 이야기를 전하는 방법은 계속 진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참, 초반 인도 상황을 이야기하며 정치적 멘트를 하는 부분이 있다. 당시(1970년) 인도의 정치혼란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만 관객들은 예상하지 못한 옥에 티 같은 대사이다. 소설의 대의나 앞으로 펼쳐질 소년 파이의 운명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박정민은 극 초반의 장난스럽고 상상력 넘치는 섬세한 연기에 이어, 구명보트에 오른 뒤 펼쳐지는 생사의 싸움, 그리고 병실에서 펼치는 복잡한 심사를 몰입감에게 연기한다. 박정민과 박강현이 ‘파이’역으로 더블 캐스팅된 <라이프 오브 파이>는 내년 3월 2일까지 GS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벵골호랑이와 함께 구명보트에 올라 ‘극한의 상황’을 테스트해 보시길. (리뷰 박재환)

▶라이프 오브 파이  (Life of Pi) ▶출연: 박정민 박강현 서현철 황만익 주아 송인성 진상현 정호준 임민영 김지혜 ▶원작: 얀 마텔 ‘파이 이야기’ ▶극작: 로리타 챠크라바티 OBE ▶연출: 맥스 웹스터 ▶무대 및 의상 디자인: 팀 하틀러 ▶퍼펫 디자인, 무브먼트 & 퍼펫 디렉터: 핀 콜드웰 ▶국내협력연출: 박소영 ▶국내 협력 무브먼트 & 퍼펫 디렉터: 정명필 ▶번역/윤색: 조민형 ▶프로듀서: 신동원, 설도권 ▶주최: 라이프오브파이문화산업전문회사, 클립서비스 ▶제작: 에스앤코 ▶공연: GS 아트센터 2025.12.2 ~ 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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