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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해가 꾸는 꿈] 박찬욱 N0.1 이마쥬 느와르


(2002년) 한국영화 팬들의 엄청난 기대 속에 개봉되었던 박찬욱 감독의 네 번째 장편영화 <복수는 나의 것>은 뜻밖에도, 아니면 '전문가들이' 염려한대로 개봉 셋째 주에 서울 박스오피스 차트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두 해 전 <공동경비구역>으로 한국영화의 흥행기록과 충무로의 영화제작 방식을 뒤바꾸어 놓았던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 말이다. 박찬욱 감독은 개인적으로 <복수는 나의 것>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맘껏 풀어놓았다고 밝혔다.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 흥행감독이 아니라 작가감독으로서 자신의 창작 의욕대로 찍어내고 편집한 영화? 

박찬욱은 공식적으로 <달은 해가 뜨는 꿈>과 <삼인조>의 처절한 흥행실패의 굴레를 지고 있는 감독이다. 하지만 그는<휴머니스트>, <아나키스트> 시나리오 작업을 했었고 단편 <심판>도 만들었었다. 그리고 이훈 감독의 <카리스마>라는 작품도 그의 필모그라피에 포함되어 있다. 어떤 경향?   대학시절(서강대 철학과)부터 영화패에 참가했고 그 때문에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감독'이라는 수사가 따라다닌다. 요즘 영상원 출신이나 영화사이트에서 글 올리는 많은 논객들을 떠올린다면 격세지감이 있는 말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박찬욱 감독은 당시 인기를 누리던 대중영화잡지(스크린)에서 홍콩영화 등에 대한 '가벼운 글'을 썼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트렌치 코트자락 휘날리던 주윤발과 비장미 넘치는 최후를 선사했던 유덕화나 장국영이 한창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층을 휘어잡고 있을 때였다. 지금은 <<키노>>라는 무거운 잡지도 그런대로 팔리고(?), 시네마떼크가 그런대로 존재하고, 'B무비'라는 용어가 사용되지만, 80년대에는 확실히, 느와르에 대한 열정이나 비주류영화에 대한 학문적 개념정의조차 시도되지 않을 때였다. 게다가 당시에는 DVD도 없었고, 국내에 수입되는 영화들조차 뻔한 것들이었으니. 박찬욱 감독은 해외 유학파도 아니지 않은가. 당시 그의 자양분은 제한적이었지만 열심히 영화보고, 토론하고, 글을 썼을 것이다.


그가 감독한 첫 번 째 작품이 바로 <달은... 해가 꾸는 꿈>이라는 제목부터 유치찬란한-혹은 시적인(?)- 영화이다. 이승철과 나현희가 주인공을 맡았다. 왜 이승철이었을까? 박 감독에게 물어볼 수가 없으니 나름대로 해석하자면.. 당시 홍콩영화에 출연하는 스타들은 영화배우이기도하며 가수였다. 그들은 영화에 으레 삽입되는 비장미 넘치고 감정풍부한 주제가를 직접 불렀다. 아마 박찬욱 감독도 그러한 싱어 송 액터를 원했는지 모른다. 우리 와이프 말로는 이 영화 개봉당시 이승철은 히로뽕 사건에서 벗어나려할 때였고, 나현희는 노래를 무척 잘 부르는 배우였단다. 아마 이런저런 이유로 이승철이 캐스팅되어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을 것이다. 

영화는 보스의 여자(나현희)를 데리고 조직을 도망쳐나간 이승철의 삶과 죽음을 기본 줄거리로 삼는다. 이승철의 행적은 그의 이복형 송승환을 통해 진행된다. 사진작가인 송승환은 이승철의 애인이 된 나현희에게 애틋한 감정을 갖는다. 하지만, 보스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는 이승철은 마지막으로 죽음을 무릅쓴 임무를 맡는다. 법정에 서는 조직의 배신자를 처단해야한다.


이런 이야기는 한때 유행이었던 홍콩영화에서 많이 본 스토리라인이다. 보스의 여자를 건드리고 도피를 하고, 여자를 사이에 두고 배다른 형제가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죽음을 불사한다. 총에, 칼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도망나와 전화기에 매달려 사랑의 말을 남긴다. 등등..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영웅본색>과 <열혈남아>,<천장지구> 같은 홍콩영화들의 명장면들이 떠오를 것이다. 시계를 보며 "매일 4시 11분이 되면 날 기억해 줘."라는 대사도 있다. 물론, 이 영화의 마지막도 흥미롭다. 영화관에서 이제는 영화스타가 된 나현희가 출연하는 영화를 보던 송승환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 스크린에 비치는 나현희를 손바닥으로 쓰다듬는 장면이다. 객석에선 "저건 뭐야!"라는 소리가 들려오고, 송승환이 뒤돌아보는순간 화면이 멈춘다. 마지막순간까지 멋을 부린 우리의 박찬욱 감독.

물론, 치기어린 데뷔작으로 평가절하할 수도 있다. 게다가 두번째 작품 <삼인조>에선 더욱 종잡을 수 없는 실험적 기교를 선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그의 두 작품을 통해 한국에서도 이런 영화 만드는 사람이 있어야한다고 믿은 모양이다. 과연 그럴까? 박찬욱의 주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함께 각본을 썼던 김용태(미지왕 감독) , 조감독이었던 윤태용(배니싱트윈 감독)을 포함하여 <휴머니스트>의 이무영 감독, 그리고 최근 영화행사나 시사회때 자주 어울리는 '갱스터'를 볼 수 있다. 김지운 감독, 동생뻘 유승완 감독, 아마 마당발 오동진 기자도 그 무리일 것이다.


그가 혹독한 실험영화의 흥행실패를 딛고 <공동경비구역>으로 한순간에 스타감독이 된 것은 제작사 명필름의 '혹독한' 기획의 승리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박 감독은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복수는 나의 것>이 처절한(시나리오에서 피가 흘러넘친다는 소문이 돌았고) B무비였다. 그런데 그것이 스타가 되어버린 송강호가 캐스팅되고 배두나-신하균이 동참하면서 영화는 비주류영화에 머물고말기에는 기대심리가 급상승해 버린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복수는 나의 것> 보고나서 할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1992년에 개봉된 <달은 해가 뜨는 꿈>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면이 없지않아 있었지만 전적으로 재기 번뜩이는 글쟁이의 습작에 머무른다. 이승철의 어색한 연기는 어쩔수 없을 것이지만 이런 영화에서 연기의 영역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피와 복수가 존재하는 느와르 장르이니 말이다. 그러나 너무나 어두침침한 조명과 상투적인 음향효과는 이 영화를 습작 이상으로 끌어올리는데 실패했다. 나름대로 매 씬들이 의미심장하고 공들였지만 모래탑같은 어설픔이 공존한다.

위대한 데뷔작을 갖지 못한 박찬욱 감독. 그의 처절한 복수극을 다시 기대할 수 밖에.도서관에서 1992년 2월 29일자 조선일보를 찾아보았다. <달은.. 해가 꾸는 꿈>의 신문광고 카피는 이랬다.

"이마쥬 느와르"

"이승철... 사활을 건 승부"

"나현희..CF 에띠앙의 주인공" 

(박재환 200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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